역사저널 그날, 성탄기획 명동성당 6월 항쟁의 중심에 서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참고인으로 경찰에 연행된 지 하루 만에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경찰은 그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발표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 집전으로 박종철을 위한 추모 미사가 열린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정권의 부도덕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에 이어, 사제들은 미사복을 입고 명동성당을 밖으로 나와 가두 시위를 벌인다. 독재에서 민주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6월 항쟁, 그곳에 명동성당이 있었다.
한국 천주교의 흑역사?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당시 한국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종교에 간여하지 않을 테니 종교도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달라”는 제안을 하고 선교사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사형 전 고해성사의 집전을 거부하고, 개신교 천도교 불교가 참여했던 3.1운동에도 불참한다. 일제강점기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묵인했던 천주교의 흑역사, 그곳에 명동성당이 있었다.
유신 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동성당
1971년 KBS로 생중계되던 명동성당 성탄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마침 이를 TV로 지켜보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생방송은 중단된다. 1974년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헌법 무효를 외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에 전국 각 교구의 신부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출범시킨다. 1975년 명동성당 3.1절 미사에서는 천주교 개신교 재야인사들이 모여 긴급조치 철폐와 언론자유 보장을 외치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일어난다. 70년대 암흑의 겨울 공화국 그곳에 유신 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동성당이 있었다.
6월 항쟁의 주인공, 명동성당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정권에 의해 축소 조작되었다고 폭로를 하게 되고, 이는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명동성당에 농성 중이던 시위대를 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할 때, 시위대를 지킨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여기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 그렇게 6월 항쟁의 승리 뒤에 명동성당이 있었다.
민주화의 성지였고,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였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처였고, 용기 있는 자들이 기댈 언덕이었던 명동성당, 12월 22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재조명한다.
정진욱 기자 jjubika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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