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36주 차 임신중절 수술로 살인 혐의를 받은 산모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1심이 인정한 암묵적 공모와 미필적 고의가 2심에서 뒤집힌 이유, 병원장과 집도의의 감형 배경, 그리고 낙태죄 효력 상실 이후 이어진 입법 공백 문제까지 통계와 법리로 짚어봅니다.
안녕하세요.
1심 징역 3년이 2심 무죄로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 살인 혐의로 기소된 산모 권모씨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김용석)는 23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권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심과 2심의 결론을 갈라놓은 지점은 권씨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느냐 하는 단 하나의 물음이었습니다.
900만원 내고 받은 36주 차 수술
사건은 2024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서 찾아간 병원에서 "아이가 너무 커서 수술을 해줄 수 없다"는 답을 들은 권씨는 지인을 통해 브로커를 소개받았습니다.
브로커가 안내한 병원의 병원장 윤씨는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고, 권씨는 900만원을 지불한 뒤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살아서 나온 태아, 그리고 냉동고
집도의 심씨는 제왕절개 방식으로 태아를 모체 밖으로 꺼냈고, 이때 태아는 살아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병원장 윤씨는 미리 준비한 사각포로 태아를 덮고 검은 봉투에 넣어 냉동고에 보관하는 방법으로 숨지게 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검찰이 임신중절이 아닌 살인죄를 적용한 근거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2분 35초 영상에서 시작된 수사
권씨는 수술을 마친 뒤 자신의 경험담을 '총 수술 비용 900만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는 제목의 2분 35초짜리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영상에는 초음파 검사를 받는 장면과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논란이 확산되자 보건복지부가 2024년 7월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그렇게 수사가 개시됐습니다.
1심 "암묵적 공모가 있었다"
1심 재판부는 권씨가 의료진과 암묵적으로 공모해 살인에 가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산모가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립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상태임을 알고도 사체 처리를 병원에 위임한다고 동의하는 등 범행에 가담했다"는 것이 1심의 판시였습니다.
수술 이전부터 태아가 살해될 것이라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본 셈입니다.
2심이 뒤집은 결정적 근거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정반대였습니다.
재판부는 권씨가 수술 전 태아가 뱃속에서 이미 사산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동의서에 서명한 것도 태아의 사체 처리를 위임한다고 이해한 것이지 태아를 살해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브로커 등을 통해 사산된 상태로 나온다고 전해 들은 정황을 종합하면, 살아서 배출된 뒤 의료진에게 살해될 것을 인식하고 용인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논란의 영상이 오히려 무죄 정황으로
주목할 대목은 사건을 세상에 알린 그 유튜브 영상이 이번엔 무죄 판단의 근거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재판부는 "제왕절개 수술로 모체에서 배출된 후 인위적으로 살해하는 사정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누구나 시청 가능한 공개된 유튜브에 게시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 납득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병원장 징역 4년, 집도의 2년 6개월
반면 병원장 윤씨와 의사 심씨의 유죄 판단은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다만 형량은 윤씨가 징역 6년에서 4년으로, 심씨가 징역 4년에서 2년 6개월로 각각 낮아졌습니다.
윤씨에게는 벌금 150만원과 추징금 900만원이 함께 선고돼, 11억5016만원이던 1심 추징금 규모가 크게 조정된 점도 눈에 띕니다.
재판부가 밝힌 양형 이유
재판부는 "살인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서 결과가 무겁고 피해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산모 의사와 무관하게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임신한 여성의 출산 여부 결정 권리는 헌법상 보장되는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며 사건의 출발점이 권씨의 임신중절 결정이었다는 사정을 양형에 참작한다고 밝혔습니다.
심씨에 대해서는 병원장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고 태아를 살해하는 과정에는 가담하지 않은 점이 유리한 사정으로 반영됐습니다.
산모 527명, 14억6000만원의 그늘
1심에서는 윤씨가 2022년 8월부터 2024년 7월까지 브로커를 통해 소개받은 산모 527명에게 임신중절 수술을 하고 총 14억6000만원을 취득한 혐의도 유죄로 인정됐습니다.
한 곳의 병원에서 약 2년 사이 500명이 넘는 수술이 이뤄졌다는 의미로, 브로커가 개입한 음성적 시술 구조의 규모를 보여주는 수치로 분석됩니다.
통계로 본 임신중절의 실제 모습
보건복지부 의뢰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수행한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서는 만 15~49세 여성 8,500명을 표본으로 조사한 결과, 인공임신중절 당시 평균 임신 주수가 6.74주로 나타났습니다.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진 경우가 전체의 95%를 넘어, 이번 사건의 36주는 통계적으로 극히 예외적인 구간에 속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관련 법·제도 정비와 상담·지원 체계 마련을 우선 과제로 꼽았습니다.
낙태죄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결정했고, 개정 시한이던 2020년 12월 31일까지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해당 조항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 임신 주수와 무관하게 임신중절 행위 자체를 처벌할 근거가 사라졌고, 검찰이 2024년 7월 이 사건에 살인 혐의를 적용해 기소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법조계가 짚는 핵심 쟁점
법조계에서는 살인죄의 객체인 '사람'을 어느 시점부터로 볼 것인지, 그리고 미필적 고의를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것인지가 이번 판결의 관건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임신 후기 임신중절을 직접 규율하는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형법상 살인죄만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입법 공백이 6년 가까이 이어지는 사이 판단의 부담이 고스란히 법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앞으로 남은 절차와 과제
검찰의 상고 여부에 따라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임신 주수별 허용 기준, 상담과 숙려 절차, 의료기관의 책임 범위를 담은 입법 논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 출처 : 조선일보, 세계일보, MBN,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등 언론보도, 커뮤니티
문해력 한 스푼
미필적 고의 : 어떤 결과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확신하지는 않아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 그래도 상관없다고 받아들이는 마음 상태를 뜻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항소심은 산모가 태아의 생존과 살해 가능성을 인식하고 용인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 고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헌법불합치 : 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만 곧바로 없애면 혼란이 크다고 볼 때, 시한을 정해 국회가 고치도록 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방식입니다. 정해진 기한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해당 조항은 그대로 효력을 잃게 되며, 형법상 낙태죄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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